조선시대 국왕의 능행길을 밝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조선시대 능행(陵幸)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진행한 연구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문화재청과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을 통해 공개하였다. 능행(陵幸)은 조선시대 국왕이 선대 왕이나 왕비의 능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는 일을 말한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강제훈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이번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능행의 목적과 의미 규명, 궁궐에서 왕릉으로 가는 능행 행렬의 구성과 능행 경로 파악, 실제 능행 사례를 분석했으며,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밝혀졌다.


첫째로, 의례를 위한 공간으로서 조선왕릉이 가지는 독특한 특성과 왕릉 의례 절차의 시대적 변화를 분석하여 능행의 의미를 새롭게 규명하였다. 조선왕릉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의례를 행하는 공간이 죽은 이를 모신 공간 못지않게 크고 중요하게 조성되어 왕릉 내에서 의례가 활발히 행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기존에 별도의 사당에서 지내던 기신제를 왕릉에서 지내기 시작하였고, 왕이 직접 행하는 의례 절차가 확대되었는데, 이를 통해 능행이 국왕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행위라는 의미가 점차 강화되었다.

둘째로, 능행 행차의 구성과 규모가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밝혔다. 능행에는 국왕의 행차 구성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소가노부가 사용된다. 조선 초기 능행 규모는 시위 병력과 의장, 동반하여 따라가는 문무백관을 포함하여 4,500명 내외로,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조정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병 중심에서 직업병 중심으로 국역(國役) 체제가 변화함에 따라 능행에도 상비병 동원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능행의 규모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략 2,900~4,000명, 많으면 6,400명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셋째로, 능행 행차에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편성된 악대의 구성과 시대적 변화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조선 초기에는 어가 앞에 악대가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선전관청 소속 악대가 어가 앞뒤에 배치되었다. 행차 중에는 삼현육각(피리, 대금, 해금, 장고 등)을 맡은 악대와 취타악기(태평소, 나발, 자바라, 북 등)를 연주하는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며 함께 했다.

넷째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 사료에 기록된 능행 사례를 전수 조사하여 시대별, 국왕별, 왕릉군별 능행 사례와 특징을 분석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사망한 1926년까지 535년 동안 총 940회, 연평균 1.76회의 능행이 있었다. 태조대부터 성종대까지(1392~1494년) 능행이 한 해 한 번 이상은 시행되었던 반면, 연산군대부터 현종대까지(1494~1674년)는 능행이 백성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인식과 오랜 전쟁 후 회복을 위해 능행 횟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하지만 숙종대를 기점으로 이후 능행이 활발해졌다. 특히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왕릉군은 무덤이 추가되면서 시점에 따라 왕릉 구성이 변화하는데, 왕릉군 형성 과정에 따라 능행 양상이 변화하는 내용을 분석한 것은 기존 연구에서는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관점이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분석을 기반으로 능행 경로를 추출하고, 조선시대 도로망을 바탕으로 한 지리정보시스템(GIS)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궁궐에서 왕릉을 오가는 왕복 경로도 지도상에 시각화하였다. 이는 향후 능행 행렬 재현 등 궁능 활용 콘텐츠 개발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이번 연구 성과를 앞으로 조선왕릉길 여행 프로그램의 신규 경로(코스)를 기획하거나 조선왕릉 내 역사문화관의 전시를 개편하는 데 반영하는 등 궁능 활용 콘텐츠 개발에 활용할 예정이다. 또한 올해 후속 연구도 진행하여 능행 경로를 더욱 정밀하게 밝혀내고, 국왕이 능행 과정에서 백성을 위로하는 활동을 하는 등 다양한 양상이 있음에 주목하여 능과 능, 능과 원·묘 간 이동 경로와 의례 시행 양상 등을 파악하여 능행과 관련한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발굴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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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수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