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당신이 대한민국입니다”

[인터뷰] 4대째 나라사랑 이어가는 공병삼 소방위

증조부는 독립유공자, 할아버지는 6·25참전유공자, 아버지는 월남전참전유공자이자 소방관. 3대가 국가유공자 가문이자 그런 가문 뜻을 이어 소방관으로 4대째 ‘공익 우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보훈명문가’ 공병삼(49) 소방위를 만났다.


공병삼 소방위는 소방관이었던 아버지를 본받아 소방관이 됐다. (사진=나라사랑신문)


지난달 1일 공병삼 소방위는 병마와 싸우는 백혈병어린이들을 위해 헌혈증 119장을 기부하고, 평생 매일 119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해 화제가 됐다.


경기 부천소방서 공병삼 소방위는 독립유공자 고 공칠보 의사의 증손자이자, 6·25참전유공자이자 전상 국가유공자인 고 공진택 씨의 손자이자, 월남전참전유공자이자 전상 국가유공자인 고 공남식 씨의 아들이다.


그는 3대에 걸친 국가유공자의 삶을 자신이 소방공무원으로 잇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공 소방위가 재직 중인 부천소방서 ‘불자동차’가 대기 중인 공간에서 만난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주어졌던 나라사랑의 길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 (사진=나라사랑신문)


“아버지는 자주 제게 군인이 되거나 소방관이 되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망설이지 않고 소방관의 길을 택했습니다. 군대를 가야할 시기, 전상 국가유공자의 자녀로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제게 병역의 의무는 당연하고도 신성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영향이 컸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던 공칠보 의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관리자들이 지역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못살게 굴자 참지 못하고 이를 응징하며 지역 일대의 영웅이 됐다.


이 때문에 공 의사는 일제의 주재소를 들락날락하며 요시찰 인물로 분류됐다. 3·1운동 당시에는 오산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명목으로 체포돼 모진 태형을 맞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1939년 돌아가셨다.


그의 할아버지 역시 6·25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해 백마고지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실명했다. 그는 의용촌에 사는 할아버지댁을 찾을 때마다 할아버지와 손을 꼭 잡고 자랑스럽게 목욕탕을 갔던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


“동네 어르신들이 ‘공씨네 손주 왔냐’며 저를 많이 이뻐해 주셨습니다. 한쪽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분들이 계셨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야 말로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시니까요. 아버지 역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월남전에 참전하셨죠. 그곳에서 부상을 입고도 소방관이 돼 화마와 싸웠던 아버지는 제 인생의 멘토이자 롤모델입니다.”


공 소방위는 7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이야기하며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국립대전현충원의 아버지 묘소를 찾아 아버지를 기억하고 스스로의 삶을 보고드린다.


그는 아버지 묘역에 직접 주문 제작해 만든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당신이 대한민국입니다”라고 적힌 명패를 놓아드렸다. 선산에 계신 증조부와 조부, 국립대전현충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한 데 모셔 ‘3대 국가유공자 묘역’을 만드는 꿈을 갖고 있다.


“아버지가 주신 큰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소방관으로 성실히 일하며, 매일매일 작더라도 이웃사랑과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헌혈 170회를 달성했고, 헌혈증 대부분을 기부했습니다. 또 기회가 닿는 대로 국가유공자의 후손으로서 그분들을 널리 알리는 일에도 앞장설 생각입니다.”


그는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을 널리 알리고 보훈문화를 확산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을 3대를 이어온 국가유공자 가문의 후손인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살 것이라 다짐하고 있다.


※ 위 기사는 ‘나라사랑신문’에서 발췌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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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철 기자 다른기사보기